[청년] 그 여름 속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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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그 여름 속에는
  • 한들신문
  • 승인 2023.09.1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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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빌라 생활재활교사 정진호

뜨거운 여름이 지나갑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햇볕이 좀 누그러졌고,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에 선선한 기운이 실려 있습니다. 누군가 입추가 지났다라고 했을 때, 함께 있던 모두가 정말이냐고 되물었습니다. 아직 여름이 한창이었거든요. 그럴 만했습니다. 절기라는 것을 잘 모르지만, 참 신기합니다. 세상과 날씨가 하루아침에 뚝딱 바뀌겠냐마는 절기가 지나면 신기하게 세상과 날씨가 달라집니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선선한 바람이 불고, 선선한 공기 속에 차가운 냄새가 묻어납니다. 그 또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 언제 또 이렇게 되었냐던 가을이었겠지요.

  이번 여름을 돌아볼 때, 기분 좋게 떠올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척 더운 날이었어요. ‘살면서 겪은 가장 더운 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게 햇볕이 날카롭고 대단히 뜨거웠는데, 그 햇볕의 온도를 쟀다면 그 숫자가 어마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좋게 기억하는 건 그날 습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햇볕은 선명하고 뜨거운데, 습하지 않았어요. 그저 빛 자체로 뜨겁고 더웠달까요. 캡사이신 소스가 아니라 매콤한 고춧가루로 맛을 낸 떡볶이 같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주 솔직하고 원래 그래야 했지만, 이제는 드물어서 오히려 반가운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었어요.

대개 여름이 습하고 후덥지근하지만, 그래도 거창이 표현하는 여름은 꽤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이곳 날씨를 표현한 기억이 있어 찾아보니 바로 지난번 원고에서였습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하루에 하늘을 세 번 볼 수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라네요. 누구는 다섯 번이라 하기도 하고요. 운전하던 어느 날, 또 깨닫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참 예쁘다고요.

생각해 보니, 거창에서는 맑은 날엔 화창한 풍경을, 흐린 날에 침침한 정서를, 비 내리는 날엔 그리움과 적적한 마음을 온전히 느끼며 살게 되더라고요.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보리차 색 햇살과 진한 오렌지색 햇볕을 구분하게 되고요. 매일 다른 하늘을 보며 살고 있더라고요. 역시 감사, 감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이곳의 여름이, 지난여름이, 지금도 우리 곁을 흘러가는 여름이 꼭 그렇습니다. 학생을 지나 어른이 되어서, 직업인이 되고 사회인으로 살면서 언제나 내 감정과 판단에 솔직할 수는 없지요. 나름대로 이 일 저 일을 살피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챙기고, 고려할 것을 떠올리고, 가능한 범위에서 최선을 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렇게만 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만 하루와 한 주와 한 달과 일 년을 채울 수는 없지요.

  그건 너무 쉽고, 동시에 너무 지난한 일이니까요. 어떤 순간에는 솔직한 구상을 꺼내고, 오래 그리던 꿈을 나누고,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 도전을 말합니다. 그러는 일이 드물고,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라 하더라도 오래오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살아 꾸물대며 버티다 싹을 틔우고 빛을 발하기도 하겠지요. 그 일부와 순간이 일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곁을 흐르는 계절로 이것을 말한다면, 곧 앞의 여름이라 하겠습니다. 캡사이신 소스가 아니라 매콤한 고춧가루로 맛을 낸 떡볶이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속이지 않으니까요. 솔직하고 분명하니까요. 고려와 계산보다 진심과 본질에 가까울 테니까요.

  뜨거운 여름이 지나갑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햇볕이 좀 누그러졌고,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에 선선한 기운이 실려 있습니다. 지난여름, 여느 때와 같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맡은 바 충실해지려 애썼고, 멈추지 않고 나아가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가족을 만났고, 그리워하던 사람과 밥을 먹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와 만나서 밥을 먹으며 다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따가운 햇볕을 맞았고, 후덥지근한 공기에 얼굴이 익었고,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머리가 젖었고, 멈출 줄 모르는 장마에 양말을 적셨습니다.

태풍이 온다던 날에는 창문을 꼭 닫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여름이 좋은지 겨울이 좋은지, 이제 정말 후회 안 한다며 겨울이 되어도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여름이 지나갑니다. 에어컨을 덜 틀고 다시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기도 하는데, 마냥 즐겁기보다 어째 시원섭섭합니다. 얼마쯤 그리워하나 봅니다. 그 여름 속에는 날씨도 있고 사람도 있고, 또 무언가에 진심이었던 나도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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