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을 아십니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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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아십니까 2
  • 한들신문
  • 승인 2023.05.0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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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영화 포스터(출처 : 네이버)
▲영화 포스터(출처 : 네이버)

 

무아지경으로 노래 부르는 종찬을 신애는 망연자실하여 바라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카메라는 종찬의 카센터 안에서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찍었다. 종찬은 신애가 온 줄 모르기 때문에 신애를 바라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카메라를 유리문 안쪽으로 집어넣어서 카센터 밖의 신애를 찍었던 것은, 도와주려는 호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투명한 장벽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장면을 통해서, 신애는 모든 고통의 과정을 결국 혼자서 치러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관계는 왜 이렇게 늘 엇갈리기만 하는 것일까? 그들은 각기 다른 시선과 감성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종찬이 신애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그 곁에 혹은 뒤에 서고자 한들, 인간은 다들 각자 ‘신 앞에 선 단독자’인 것이다.
 
  맨 처음 밀양에 도착했을 때, 신애는 묻는다.
“밀양이 어떤 곳이지요?”
종찬이 대답한다.
“뭐, 사람 사는 데 다 똑 같지요.” 
영화 앞뒤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대사이다.
  종찬의 말처럼 사람 사는 데는 어디든 다 똑같다. 신애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일상일 뿐이다. 그 일상이라는 현실이 ‘밀양’이라는 공간으로 축약돼 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현장 모두가 ‘밀양’인 셈이며, 그 ‘밀양’이라는 공간이 인격화된 게 종찬이기도 하다. 
  이창동 감독은, 신애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보통 여성으로, 나름대로의 욕망을 실현하거나 성취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여러 번의 배반과 상처를 체화하며 살아온 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신애는 남편을 잃은 후 밀양으로 내려와 자신이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보려 한다. 그러나, 돈이 있는 척하는, 자기를 기만하는 듯한 모습 때문에 고통에 빠진다. 하지만 보통 여자인 그녀의 고통에 대해 그 누구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아무튼‘밀양’에서 구원과 용서를 찾던 신애는 이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영화 <밀양>은 유괴나 살인, 종교, 광기 같은 것이 소재로 나오고, 사건은 많지만 사건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그저 그 일로 인해 야기되는 한 인간의 고통을 보여줄 뿐이다.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과 <초록물고기>, <오아시스>나, <밀양> 이후의 영화 <시>와 <버닝>에서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주로 ‘고통’을 주제로 그린다. 그런데 그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고통은, 자기가 경험하는 것까지만 알 수 있다. 영화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그게 인간 존재와 관계의 부조리이며 모순이다. 그리고 어떤 고통은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 신애가 당한 고통이 그런 고통이다. 가해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미워해봐야 그녀의 고통만 깊어질 뿐이다. 
  나 역시 그날 밤 차 속에서 신애랑 함께,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 앞에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뼈저리게 아파하며 울었던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나에게 해를 가한 자에게 복수하라고 부추긴다. ‘복수는 나의 것’이어야 한다. 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이 그렇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으로’는 동일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배상법으로, 피가 피를 부르는 잔혹한 법이 아니다. 오히려 자비로운 법이다. 복수를 최소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다. 그러므로 나 자신에게 내재된 자기중심적인 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쉬 그것을 뛰어넘으려 한다면 어느 순간 신애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의 삶이 위대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징하게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생에 대한 질긴 욕구는 슬픔을 배반하고 징그럽게 싹튼다. 그리고 삶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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