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로 가는 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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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로 가는 길1
  • 한들신문
  • 승인 2023.09.1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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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삽화 : 김녹촌
▲삽화 : 김녹촌

외가는 내 문학의 고향 같은 곳이다.

  친가 쪽 친척들이 멀리서 살거나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 식구는 자연스럽게 외가와 가깝게 지냈다. 주말이 되면 십여 리 떨어진 외가를 방문하곤 했는데, 온 가족이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에 함께 타고 가거나 아니면 우리 삼 남매가 타박타박 걸어서 그 길을 오가곤 했다. 어린아이 걸음으로 십 리는 꽤나 먼 길이어서 우리는 그 길을 오가는 내내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길에서 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도하는 일은, 주로 맏이인 내 몫이곤 했다. 그리고 십 리 길을 채워야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평범한 일상사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어서, 책에서 본 이야기를 하거나 그것도 미진할 경우에는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의 뼈대에다 내 맘대로 살을 붙이거나 내용을 장식하여 스토리를 좀 더 풍성하게 부풀려 낼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그 날의 날씨가 이야기의 발단이 되고, 지나가는 길가 풍경은 배경이 되었다. 오가다 만나는 사람들은 보조 인물이 되거나 사건을 다채롭게 전개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나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고 시시각각 변하는 동생들의 반응은, 원작에 대한 나의 각색이나 윤색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산에 둘러싸인 궁벽한 산골에서 자랐지만, 나는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과 교육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위 쁘띠 부르주아처럼 어린 시절을 보냈다. 6·25 직후의 베이비부머로서, 그 어려운 시대에 유치원을 다녔고 사립국민학교(초등학교)를 나왔다. 여름에는 하늘색 원피스 하복을 입었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베레모에다 하얀 칼라가 달린 짙은 감색 모직의 동복을 입었다. 주말마다 원상동 물가 왕버들 숲으로 야외수업을 가서 그림도 그리고 싱얼롱(sing along)도 했다. 그야말로 우아한 나날을 보냈다.

  구한말에 어떤 할머니가 선교단체의 유치원을 다녔는데, 삶의 질곡 때마다 , 이래 봬도 유치원 나온 사람이야!”라면서 자존감을 불러들였다는데, 나 역시 어린 시절, 그런 교육환경에서 자란 것이 굴곡진 삶의 여정에서 자긍심을 회복하는 데 정서적으로 큰 힘이 되곤 했다

부모님은 자녀 교육을 위해 기꺼이 고급 양장의 아동 문학전집을 구입했고 나는 그 책들을 즐겨 읽었을 뿐 아니라, 부모님의 장서들에까지 호기심을 갖고 때론 연애소설도 몰래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양에 차지 않아서 주변 친구들 집에 있는 책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리하여 제법 두둑한 독서량을 장착한 내가 외가에 가면, 단연 그 또래에서는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가에는 안채, 사랑채, 아래채뿐 아니라 디딜방아가 있었고 집 바로 뒤에는 공동우물까지 있어, 늘 사람들이 붐볐다. 게다가 머슴과 상주하는 식모(그 당시에는 가사 돌보미를 식모라고 불렀다)까지 있어서 집 안팎으로 수많은 이야기가 양산되었다. 과수원도 있었는데, 과수원을 오르내리는 산길에는 모험 꺼리가 넘쳤다. 산길을 오르다 보면 조그만 샘이 있고 그 샘을 돌아가면 늘 뱀이 출몰했다.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이름 모를 새와 작은 짐승들이 부스럭거리며 스치거나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과 갖가지 과일 향기가 언덕배기에 흘러넘쳤다. 우리는 외가에만 가면 늘 신바람이 났다.

  외가는 면 단위라, 읍내에서 간 우리는 동네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 또한 동네 아이들과 노는 일은 늘 새롭고 즐거웠다.

금귀봉까지 소몰이를 따라가 감자 사리(사리: , 밀 따위의 곡식을 불에 그을려 먹는 것을 이르는 말)나 콩 사리를 해 먹고, 친구들이랑 동막골 연못에서 메기도 잡았다. 달래강에서는 꺽지, 뜽가이도 낚아 올리고, 황금빛 찬란한 모래무지도 잡아 친구의 고무신에 담았다. 냇물에서 멱을 감다가 추워 입술이 새파랗게 변하면 햇빛이 작열하는 모래사장에 납작돌을 구들장처럼 깔고 그 위에 누워, 눈이 시릴 때까지 해를 바라보거나 새파란 하늘에 흐르는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몽환적인 꿈을 꾸기도 했다. 그 모든 일들이 읍내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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