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⑮ 1920년대 거창의 민족교육운동
상태바
[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⑮ 1920년대 거창의 민족교육운동
  • 한들신문
  • 승인 2021.09.13 1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창에서도 초등교육기관을 설립하다

 

거창지역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은 오늘날 거창초등학교의 전신인 ‘거창공립보통학교’이다. (이하 거창공보교). 거창공보교의 전신은 1907년 신교육 실시를 목적으로 거창향교에 세워진 ‘거창소학교’이다. 거창소학교는 1908년 5월 사립 거창보통학교로 개칭, 일본인 교장이 부임하였으며, 7~12세 되는 학생을 모집하여 4년제 보통 교육을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거창공립보통학교 전경 (1920~30년경)

  1909년에는 거창의 개화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신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소학교의 후신으로 ‘원명학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전국 각지의 초등학교를 공립보통학교로 통일하였다. 원명학교는 1911년 5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거창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당시 일제의 소학교는 6년제였지만 거창공립보통학교는 초기에 4년제로 운영되었다. 각 학년 1학급, 학급 정원은 50명이었다.
  1913년 6월 12일 거창학교조합이 인가되었다. 학교조합은 거창읍 일대의 지역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조합비를 징수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다. 1925년 거창공보교는 현재 자리에 교사를 신축하였다. 1927년 거창공보교 학생 수는 남학생 658명, 여학생 184명, 총 14학급 842명이었다. 교사 수는 교장 1명을 포함한 14명이었다.
  오늘날 위천초등학교의 전신인 위북공립보통학교는 거창공보교와 비슷한 경로로 설립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지역 유지 정태균이 1913년 4월 위천에 설립한 사립 고북학교가 위천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었다. 위천공보교는 1916년 3월부터 6년제 학교가 되었다. 1927년 당시 학생수는 남학생 249명, 여학생 24명, 총 6학급 283명이었다. 교사는 6명이었다. 
  이어서 웅양, 가조, 남상, 신원면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웅양공보교는 1920년 4월에 설립되었고 1925년부터 6년제로 운영되었다. 1927년 당시 학생 수는 남학생 207명, 여학생 23명이었으며 총 6학급에 교사 수는 6명이었다. 가조공보교는 1920년 9월에 설립되었다. 1927년 6년제가 되었고 당시 학생 수는 남학생 190명, 여학생 16명이며 6학급으로 교사는 5명이었다. 신원공보교는 1926년 5월에 설립되었다. 1927년 당시 4년제이며 학생 수는 남학생 120명, 여학생 20명으로 2학급이고 교사가 2명이었다. 남상공보교는 1926년 8월에 설립되었다. 1927년 당시 4년제였으며 학생 수는 남학생 146명, 여학생 4학급에 교사는 4명이었다.
  이와 같이 1927년 당시 거창지역의 공립보통학교는 거창, 위천, 웅양, 가조, 신원, 남상 등 총 6개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에도 학교 설립이 계속되어 1927년 가북공보교, 1928년 마리공보교와 남하공보교가 설립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주상, 북상, 고제, 월천면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1932년 당시 거창군에는 13개 면에 공보교가 모두 설립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실무 교육의 강화와 단기 교육을 목적으로 개설된 초등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간이학교’가 있었다. 2년을 수료함으로써 끝나는 종결 교육기관으로 정규 학제와는 상관이 없는 학교였다. 
  1934년 이후로 일제가 보통 교육의 보급이라는 미명 하에 거창 지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저급한 실업 교육과 일본어 교육을 통해 낮은 수준의 노동력을 대량으로 양성하여 착취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입학 연령은 대체로 10세로 규정되어 있었고 교원은 1개교 당 1명 정도였다. 교과목은 일본어, 조선어, 산술을 포함하는 보통 교과와 직업과를 합쳐 4과목에 불과하였다. 주당 수업 시간은 30시간 이내였다. 상급 교육기관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었으나 졸업 후 보통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거창보통학교 학생들의 모습(1930~40년경)
일제강점기 거창보통학교 학생들의 모습(1930~40년경)

 

  간이학교가 설립될 당시까지 조선에는 보통학교 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보통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자체적인 힘과 노력에 의해 세워진 강습소를 중심으로 기본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제는 이들 강습소에 대한 보다 용이한 감시와 통제를 위하여 강습소를 간이학교로 전환하도록 유도하였다. 
  거창의 간이학교는 1934년 북상면 월성간이학교를 시작으로 1935년 신원면 양지간이학교, 1936년 남하면 지산간이학교, 1937년 남상면 임불간이학교, 1940년 가북면 중촌간이학교, 고제면 개명간이학교, 1941년 마리면 대동간이학교, 1943년 가조면 석강간이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들 간이학교는 1945년 해방 이후 대부분 국민학교로 전환되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 참고문헌
1. 거창교육청, 『거창폐지학교 사진자료집』, (2010) 
2. 신용균, 『한국사에 비추어 본 거창+의 역사』, 역사공간 (2015)
3. 조재원, 『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 (2020)

※ 신문자료 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 「거창학교 설치문제」 (『동아일보』, 1922. 1. 26)
2. 「웅양공보 증급 삼면민의 열성으로」 (『동아일보』, 1924. 4. 9)
3. 「육년제로 연장 위북학교 확장」 (『동아일보』, 1925. 3. 22) 
4. 「보교 설치운동 거창군 가북면에서」 (『동아일보』, 1926. 11. 26)
5. 「읍외면과 합병하야 학교설립운동 」 (『동아일보』, 1928. 5. 27)
6. 「마리공보교 금월 하순 착공 」 (『동아일보』, 1928. 3. 4)
7. 「공보설립운동 면민대회 개최」 (『동아일보』, 1930. 12. 17)
8. 「기개인의 반대로 학교기성문제」 (『동아일보』, 1932. 4. 24)
9. 「준비중의 고제공보 개교」 (『동아일보』, 1932. 5. 14)
10. 「거창공보의 증축설을 두고」 (『동아일보』, 1936. 5. 28)
11. 「남하공보 학연연장 기성회 조직」 (『동아일보』, 1937. 11. 4)
12. 「웅양소교융연」 (『동아일보』, 1939. 7. 9)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